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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낮의 가장 더운 시간에 아브라함이 자기 천막 입구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세 사람이 자기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는 순간 즉시 달려나가 그들을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말하였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다면 주의 종을 그냥 지나가지 마소서. 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 쉬소서. 내가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이왕 종에게 오셨으니 음식을 잡수시고 힘을 얻으신 다음에 갈 길을 가소서' 그러자 그들은 '좋다. 네 말대로 하라' 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당신은 제일 좋은 밀가루 한 됫박을 가져다가 서둘러 빵을 좀 만드시오' 하였다. 그리고서 그가 소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하고 살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 하인에게 주자 그가 급히 요리를 하였다. 아브라함은 버터와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놓고 나무 아래서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이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천막 안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여호와께서 '내년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 사라는 그 뒤 천막 입구에서 듣고 있었다. (창 18:1-10)

7년을 일한 감리사직을 그만두고 다시 교회 담임목사로 돌아간다. 파송결정이 나는 순간 어깨에 눌렸던 무거운 짐을 벗는 느낌(?), 그리고 나도 이제 섬길 교인이 생겼다는 기쁨(?), 한인 교회가 아닌 미국교회,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에서 목회해야 한다는 약간의 긴장(?),  감리사로서 65개 교회를 치리하며 해 보고 싶었던 목회, 그리고 케비넷에서 이런 저런 교회 문제와 리더쉽 훈련에서 배운 것들을 적용해 보고 싶은 약간의 흥분(?), 그리고 내 인생 목회자로서 마지막 부분을 맛있게 멋있게 사역하고 싶은 소망(?),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다 잠시 접어 두고 이 파송이 갖는 성서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나그네 인생이라는 통찰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많이 부르던 복음성가 가사도 생각났다. 우리 모두는 처음엔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목회위원들을 만났다. 그분들도 어떻게 동양목사를 맞아야 할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7년을 미국교회 감리사로 일했지만 막상 담임목사를 한다고 사람들을 만나니 약간은 어색했다.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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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다 낯선 사람들의 만나는 얘기들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방인, 유리 방황하는 민족이라 소개하고 있다. 신명기 26:5-9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이었는데 그가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능력과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이 곳으로 인도해 내시고 기름지고 비옥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히11:13)

서로 낯선 사람들로 만나지만 거기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낯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기쁜 소식들을 가지고 온다. 낯선 엘리야를 만나 극진히 대접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엠마오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을 대접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낯선이를 대접했는데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었으며 사라가 아이, 이삭을 가질 것이라는 기쁜소식을 듣는다.  집 주인은 음식을 대접했고, 손님은 선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져온 이 선물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낯선이는 다른 관점, 다른 경험, 다른 통찰과 문화를 가져오고, 하나님을 섬기는 다른 방식을 알려 준다. 따라서 낯선이는 기존의 생각과 관점을 흔들어 놓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이다.  낯선이도 주인의 방식과 삶을 통해서 도전을 받는다. 불편하면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관계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였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 주었으며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 (마25:35) 낯선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제일가는 덕목이다. 이 차원을 모르면 우린 가장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도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딴전을 피우고 철면피가 되기 쉽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베푸는 친절은 우선 판단중지, 그리고 내가 지닌 문제들을 상대방에게 투사시키지 않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 선입견을 버려야 낯선이를 맞을 수 있다. 라틴어에 증오(hostis-적)와 환대(hospes-손님)는 같은 말의 어원이다.  환대는 손님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열려있는 빈 공간을 준비할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을 맞기 위해선 빈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빈 공간은 서로 몰라 두려움이 자리는 곳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친근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생활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될 수있도록 하는 선물이 되어야 한다." 결국 주인의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손님대접 방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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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낯선이로 만나 친해졌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낯선이로 다가갔다. 손님과 주인은 선물을 교환한다. 하지만 손님을 맞거나 손님으로 다가가면 모든 게 변한다. 변해야 한다. 지금 내 방식으로는 손님이 될수도 주인이 될수도 없다. 서로가 맞추어 가야 하고, 서로가 지닌 선물을 받으려면 서로 바꿔야 한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삶은 풍성해지거나 불편해 질 수 있다. 

낯선이를 만나면 의심과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자연스런 반응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 사람들이 내게 무슨 불편과 위험과 안정감을 깨뜨리려 하는가? 하지만 낯선이를 맞이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일이다. 예수님 말씀하셨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 주었다." 

우리는 모두 낯선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가족이 되었다. 낯선이는 기쁜소식과 선물을 지니고 온다. 주인도 잠자리와 음식과 정성을 기울이는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기대를 가지고 서로를 따뜻하게 맞아 서로 배우고 나누며 즐기는 일이다.  

목회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주일마다 나에게 주어진 교인들을 바라보며 설교를 하고 교제를 하고 삶을 나눌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된다.  마지막 목회를 마치고 은퇴하는 순간까지 낯선이들을 만나 내가 가진 선물을 나누고 그들이 가진 선물들을 마음껏 받아 누릴 것이다. 아마도 이 말씀이 첫 설교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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