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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자! 교도소 담벼락에 조폭이 쓰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설교가 그렇다. 착하게 살자는 얘기는 못되게 살아왔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들이 맘이 안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빗대서 친구들끼리 이런 말도 한다. "나한테 설교하지마!" "설교하고 있네!" 


충고하지 말자.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런 조언도 하지 말자. 자기 인생도 코가 석자이면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든다. 말로는 그렇다. "다 너를 위해서 내가 해주는 말이야." 이말의 이면에는 "너의 말, 너의 행동이 내 맘에 안들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수는 없겠니?" 이루지 못할 일들이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세월 우린 이런 충동에 속았는가.


판단하지 말자. 내 잣대로 세상을 보고,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판단중지 (에포케), 있는 그대로 묘사. (훗설의 현상학) 이런 연습은 참으로 귀중한 영성훈련이다. 판단중지, 현상묘사, 그리고 기다림. 상대방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도록 기다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느낌으로 상대방을 결정하고 판단해 버린다. 이건 폭력이다. 여기 충고까지 겹치면 인간관계는 오리무중, 난장판이 된다. 


그러니 인간관계가 정상이겠는가?  우선 흙탕물을 가라앉혀야 맑은 물이 보인다.  맑은 물이 되어야 사물이 제대로 보인다. 휘저으면 또 흙탕물이 올라온다. 맑은 물 따로 붓고, 가라앉은 흙들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컵도 깨끗이 닦고, 맑은 물을 부으면 투명해진다. 투명하면 있는 그대로가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면 오해가 사라지고 진짜 만남이 시작된다.  진짜 만남은 깊은 관계로 축복해 오며 인생은 풍성해진다. 


내 생각을 가라앉히고, 내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는 눈을 가지면 세상을 더 효과적이고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다.  인간관계 또한 투명해진다. 건강한 몸, 다양하고 심도 있는 인간관계,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 수영장 딸린 멋진 집, 잉꼬부부, 고매한 인격을 가진다면 행복할까? 또 이런것들을 얻기위에 또 아까운 시간, 남은 인생 열정을 불사를 것인가?


다 부질없다. 아니 부질 없다고 말할 정도로 강심장이거나 초월심을 지니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더 갈증을 느끼며 부지런히 찾고 있다. 특별해져야 한다는 내 거짓자아가 지독히도 평범하기만 한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거창하게 하나님, 예수님 이름까지 들먹이며 말이다. 


착하게도 고약하게도 살려 하지말고 그냥 자신을 가만히 놔두자.  남의 인생 상관하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바라보자.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타타타) 나를 좀 알아달라고 구걸하지도 말자. 내 자존심을 높여달라고 요구하지도 말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남과 비교하지도 말자. 쓸데없는 우월감으로 남에게 충고도 그만두자. 끊임없이 올라오는 판단과 심판을 멈추고 그냥 가만히 나를 바라보자.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두루 감쌀 것이다.  그러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꿀 필요도 없어지고,  나의 존엄과 특별함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어리석게 살아온 세월이여, 끊없이 보채며 나를 힘들게 한  한심한 인생이여!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당신은 하늘입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노을이 물들고, 바람이 지나가는 하늘입니다." (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