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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묻히셨다는 무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눅 23:34)


불교에서는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현실의 괴로움은 생로병사,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미워하는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행복에 이르는 길, 즉  여덟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 팔정도이다.  


결국 모든 종교는 이런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를 말하고 있다. 그 행복의 길이 내세에 두기도 하고 현실에 두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고통을 해결하고 있을까? 고통을 대면하는 두가지 길을 성경에서 볼수 있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요, 또 하나는 도망치는 길이다. 


괴로운 현실, 못마땅한 사람, 풀리지 않는 일들을 어떻게 해결하나? 싸우는 길이 있다. 사람과 일들을 바꾸고, 해결하고, 조절하고, 개혁하려는 시도이다. 공격을 하고, 미워하고 그러다가 상대방을 죽이거나 일을 완전히 뒤 엎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죽여 없애야  하고 잘못된 일은 뜯어 고쳐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런 심리 이면에는 자기는 옳으니 힘을 가져 자신을 괴롭히는 불합리한 현실을 좌지우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칼을 들고 나서는 제자에게 게세마네에서 칼을 거두라 하셨다. 칼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대신 당신이 상대방의 잘못을 자신에게 옮겨 스스로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고통해결방식이다. 달게 받는 것이다. 칼을 든지 칼로 망한다는 사실을 아신 것이다.  자신이 미워하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자기도 갖고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더 잘 본다.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더 잘 보는 것이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은밀하게 숨기고 위장한 것들이 상대방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더 싫어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길은 싸우기 보다는 도망치는 방법이다.  정면으로 싸우기 보다는 도망치면서 가장하고 투사하고 아니면 혼자 환상에 빠지면 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뉜다.  항상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갈린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내 맘에 들면 좋은 사람, 나에게 무례하고, 내 맘에 안들면 나쁜사람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찜찜했었는데, 마침 잘 만난것이다. 한참을 욕을 하고 나니 시원하다. 흉보면서 내가 안에 떨떨음한 것들을 쏟아내고 나니 상쾌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싸워도 없애도 안되고 도망쳐 감추어도 안없어지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예수님이  귀를 잘랐던 제자를 "칼을 든자 칼로 망하리라" 나무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밥먹는다 불평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갈 놈"이라 혼내셨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여기에 복음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맞짱뜨지 않아도 되고, 도망가지도 않아도 될 복음의 길은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초대하셨다.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않으면서 초월하는 제 삼의 길이다. 싸우는 대상이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거짓된 자아이고, 쉽고 안이한 자기 중심의 거짓된 자아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큰 품으로 안기는 일이다. 큰 하나님을 아주 작은 내 자아로 어떻게 품을 수 있겠는가? 내 작은 자아가 하나님의 큰 품에 안기면 되는 것을.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일컫는다. 


다른 사람과 상황을 바꿔보려는 무모한 싸움도 아니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끊임없이 판단 정죄하며 자신의 작은 세계로 도망치는 일을 그만두고 그분의 넒은 품에 안겨 이미 거기에 있는 풍성한 삶, 생기넘치는 생명을 누리는 일이다.  복음 없는 율법의 세계가 얼마나 힘없고 불구인지를 모든 편지에서 바울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이유가 이랬던 모양이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골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