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택도 없는 요구를 하신다.  원수란 내 삶을 망가 뜨리고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사람들이다. 나를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한 사람을 이해하기도 힘든데 복구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 망가뜨린 사람을 사랑하라니 도데체 사랑이 뭐길레 그렇게 하라시는 것인가? 또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불가능한 사랑을 하라시는 것일게다.


사랑이란 말들을 쉽게도 하는데 사랑이란 무엇일까? C. S. Lewis는 사랑을  조이 데이비드맨 여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 경위를 예로들어 넷으로 나눠 설명한다. 이혼녀인 조이여사가 두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골수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60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던 루이스는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조이여사에게 청혼을 하고 병실에서 눈물겨운 결혼식을 한다. 병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눈을 감게 해주겠다는 그의 정성이 통했는지 회복을 했다. 약 4년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시간을 보냈다.  암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조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스톨케라 이름지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한 스톨케 사랑은 두 사람에게 깊은 필리아라는 우정으로 발전한다.  자주 만나 우정을 나누던 둘은 이제 남녀간의 깊은 사랑, 에로스에 빠지게 된다.  조이와 조이의 전 남편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얻고 아버지로서 첫경험을 하면서 경험한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도 경험한다. 


루이스는 이런 4가지 종류의 사랑에서 세가지 속성을 발견한다.  부모가 아무런 댓가없이 자녀를 위해 베푸는 요구없는 일방적 사랑, 이것을 루이는 "선물로 주는 사랑" (gift-love)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피해 부모품에 안기는 것처럼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도 있다. (need-love) 일면 사랑이 아닌 의존인듯 싶지만 부모의 필요를 강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사랑임에 틀림없다.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는 자녀가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치 않는 인간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없다는 인간의 교만이 가장 큰 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꽃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고, 살아 있음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 그대로를 즐거워하는 감사적 사랑이 있다. (appreciative love)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사랑은 자기 중심적 사랑이다. 자기중심적  조건적 사랑이 나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그냥 머물기 때문에 파괴적일 뿐이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감사하는 사랑도 있어야 한다.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며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극치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데에서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일방적으로 하는 내리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성과 정의와 겸손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질투와 집착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우정은 소중하다. 우리의 성장을 돕는다. 하지만 "우리끼리"라는 배타적 감정과 우리만 특별하다는 우월감이 끼어 들면 우정은 집단적 공격성으로 발전한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에로스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을 내어 주기 때문에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 하지만 상대방을 우상화하며 신실함과 진실함으로 보충되지 않으면 깊은 애착 집착으로 파멸을 가져온다. 


루터 킹 목사는 삶을 온전하게 하려면 3가지 사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하고, 이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넓이로 확장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인 이 모든 사랑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와 이웃을 사랑하는 넓이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높이가 완성된 사랑으로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왜 그런지 엔소니 드멜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원에 핀 장미를 보라.  좋은 사람에게 더 좋은 향기를 뿜어내며 나쁜 사람에게는 향기를 거두는가? 아니다. 장미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똑같이 향기를 낸다.  집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라. 누구에게나 그늘을 내 주며 열매를 내어 준다. 심지어 자기에게 도끼질 하는 나무군에게도 쓰러질때까지 그늘을 내 준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다.  (고전13:4)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와 해를 주시는 하나님을 닮았다.  그리고 사랑은 그냥 내어 준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린 우리의 기대에 못미치는 사람들을 밀어낸다. 나무처럼, 장미처럼 그냥 내어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잘 모른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욕심일 경우를 알아차리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줄을 모른다. 장미는 향기를 내는 일에 바쁘다. 자신으로 남아 있기도 바쁜데 기대하며 댓가를 바라면 사랑은 댓가를 바라는 거래로 끝난다.  따라서 사랑은 상대방을 놓아준다. 다시 말하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되도록 도와 주며 자신을 살아갈 자유를 허하는 것이다. 장미는 자신의 향기를 맡아 달라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인정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그냥 상대방을 가만히 놔둔다. 상대방이 상대방 답도록 자신을 내어주어 자유롭게 만든다. 그게 사랑이다.


그러면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뭘까? 기분나쁠 때를 생각해보자.  긴장해 있고, 걱정과 근심으로 쌓여 있을때를 생각해보라. 두려움과 크나큰 스트레스에 쌓여 있을때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다. 내가 나를 들들 들볶는 것이다.  화가 날 때마다 그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는 것이다. 나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지를 살피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방은 상대방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뿐 내가 화나는 이유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것을 내가 가졌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싫어하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면 나는 진다.  상대방에게 내 기대에 맞추어 살아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내겐 없기 때문이다.  내게 입력되어온 내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상대방이 살아주길 원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나를 화나게 하는 상대방은 그것으로 인해 내가 화가 나 있는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데 그것 때문에 화를 내면 누가 다치나? 나만 상한다.  방법은 없는가? 있다.  자신이 왜 화가 나고 왜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는지를 발견하면 된다. 예수님 기도하셨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무슨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이해하신 예수님은 용서도 하실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원수를 가엷게 여기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